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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여는 음악 10월 14일(월)✱

 

▲가을을 부르는 로망스

  ◾안나 게르만(Анна Герман)①

 

   ◀정원에 꽃이 필 때

      (Когда цвели сды: 까그다 쯔벨리 사드이)

   ◀가을의 노래

      (Осенняя Песня: 오센냐야 뻬스냐)

   ◀나 홀로 길을 가네

      (Выхожу Один Я на Дорогу: 브이하쥬 아딘 야 나 다로구)

   ◀사랑의 메아리

      (Эхо Любви:에호 류브비)

      ◾영화 ‘운명’(Сдьба:수지바) 中에서

           *안나 게르만 전기 영화


 

◉ 10월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단풍이라는 이름으로 나뭇잎들은 물들어 가고

대부분 꽃도 화려한 시절을 마감하는 때입니다.

떠나가는 꽃들의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찬 이슬을 머금고 생기 있게 피어나는 꽃도 있습니다.

강렬한 청보라색으로 늠름하게 숲 속에 등장해

10월을 생기 있게 만들어 주는 꽃,

바로 용담(龍膽) 꽃입니다.

가을의 대명사 국화과 꽃이 아니어서 더욱 이채롭습니다.

 

◉ 짙은 청보라색은 쪽빛 하늘색과 닮아있습니다.

그래서 짙은 가을하늘 한 조각이

꽃잎에 내려앉은 듯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주로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귀한 용담꽃을

몇 해 전 뒷산 수풀 속에서 만났습니다.

주변을 정리해 주고 몇 뿌리는 집 정원으로

옮겨 잘 보살펴 줬습니다.

 

 

 

◉ 여러해살이라 겨울을 잘 넘길 것 같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돼서 짚으로 싸주고 멀칭 해줬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봄에 힘차게 잎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10월 들어 한로가 지나자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수풀 속의 용담도 뒤질세라 뒤따라 차례로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한여름 몽골 초원에서 만났던 웅담꽃을 올해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두 차례나 만나는 행운을 갖게 됩니다.

 

◉ 용담꽃이 피자 떠돌이 좀뒤영벌이

귀신같이 알고 몰려듭니다.

호박벌의 일종인 좀뒤영벌은

집 없이 떠도는 유랑 벌입니다.

이꽃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며 꿀을 빨아먹고 해가 저물어 꽃잎이 닫히면

꽃 속에서 밤새 호사를 누리기도 합니다.

하룻밤을 묵는 동안 묻힌 꽃가루로 다음날 수정을 도우면서

하룻밤 숙박비를 치릅니다.

둘 사이에는 서로 돕고 사는 공생의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 용담(龍膽)을 그대로 풀면 ‘용의 쓸개’입니다.

뿌리의 쓴맛이 곰의 쓸개인 웅담(熊膽)보다 더하다고 해서

신성한 상상의 동물 용을 불러와 붙인 이름입니다.

양약고구(良藥苦口),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이 고사성어가 딱 어울리는 용담입니다.

웅담을 귀한 약재로 여기는 것처럼

한방에서는 용담을 오래전부터 귀한 약재로

사용해 왔습니다.

 

◉ 종 모양으로 생긴 용담꽃은 모양도 색깔도 품위 있습니다.

최상의 이름을 얻은 꽃이니 그 정도는 돼야 격에 맞습니다.

그래서 용담꽃을 정원에 들이면 휑하고 쓸쓸해지는

가을 정원이 한층 모양이 납니다.

게다가 귀한 벌들까지 몰려들어 생기가 넘칩니다.

 

◉ 정원에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나는 한창의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러시아 로망스의 여인 안나 게르만(Анна Герман)이

그려내는 정원의 풍경입니다.

안나 게르만의 주옥같은 러시아 로망스 노래들이 담긴

앨범 ‘정원에 꽃이 필 때’

(Когда цвели сды: 까그다 쯔벨리 사드이)의

타이틀 노래입니다.

 

◉ 이 앨범에는 ‘가을의 노래’와 ‘나 홀로 길을 가네’ 등

그녀의 대표적인 가을 로망스 노래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노래들과 함께 가을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정원에 꽃이 필 때 달콤한 꽃의 향기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사랑을 고백하는 너의 말에서도

달콤한 향기가 흘러넘치는 건 마찬가지다.’

‘정원에 꽃이 필 때’는 그녀 특유의 애수 어린

차분한 분위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꽃과 사랑을 엮어 밝고 긍정적인 톤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https://youtu.be/ic2oBzeyaFk?si=vbZ4BXR9ZENJNqyl

 

 

◉ 안나 게르만의 ‘가을의 노래’

(Осенняя Песня: 오센냐야 뻬스냐)를 듣지 않고

가을을 넘기기에는 어딘가 허전합니다.

좀 더 가을이 깊어진 만추(晩秋)에 어울리는 노래지만

앞당겨 듣습니다.

헤어진 사랑을 애절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노래입니다.

러시아 로망스는 헤어짐과 그리움의 정서가 흐르는 노래가

많아 쓸쓸한 가을 분위기에 잘 어울립니다.

그런 노래들이 안나 게르만 특유의 감성적이고

애절한 목소리에 얹어지면 한동안 귓전에서 떠나지 않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번역 자막이 있는 버전입니다.

 

https://youtu.be/CuNfwVW3Fl8?si=rZzCdAanENMURAUL

 

◉20세기 공산 소련의 암울한 시대를 살다가

일찍 떠난 안나 게르만입니다.

19세기 역시 암울한 러시아 시대를 살다가 일찍 떠나간

청년 시인의 시로 만든 노래를 그녀의 목소리에 실어봅니다.

스물일곱 살의 시인 레르몬토프(Лермонтов)가

1841년 결투로 숨지던 그해 쓴 시가 바로

‘나 홀로 길을 가네’(Выхожу Один Я на Дорогу:

브이하쥬 아딘 야 나 다로구)입니다.

 

◉ 이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의 시에는

레르몬토프가 어린 시절과 추방 시절을 보냈던

까프까즈 지역 가을 전원 정서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년 후에

에리자베타 샤쉬나(Шашина)라는 작곡가가 곡을 붙여

로망스의 대표곡 가운데 한 곡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러 가수가 불렀지만 그래도 역시 안나 게르만의 목소리로

들어야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로망스가 됩니다.

 

https://youtu.be/qTIOP2X_Fn8

 

 

◉ ‘러시아 로망스의 여인’ 안나 게르만이

공산 소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혹독했습니다.

그녀는 두 살 때 태어난 곳 소련령 우즈베키스탄

우루겐치에서 아버지를 잃습니다.

소련이 펼친 反독일작전으로 독일계 아버지는

터무니없이 간첩 혐의로 처형됩니다.

그래서 어릴 때 그녀는 가족 이력을 숨긴 채

네덜란드 혈통의 어머니를 따라

시베리아로, 타쉬겐트로,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독일계 폴란드인과 재혼하지만

그 역시 숨지자 아예 둘째아버지의 나라인

폴란드로 옮겨가 살았습니다.

 

◉ 폴란드에서 지질학을 공부했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음악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과 폴란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로망스를 상징하는 가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1967년 그녀는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어렵게 회복한 뒤 소련으로 돌아가 활동하지만

교통사고의 후유증 때문인지 결국 결혼해

아이가 태어난 1982년, 마흔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과 이별합니다.

 

◉ 그녀가 떠난 지 42년이나 됐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러시아 로망스를

아름다운 장르로 승화시킨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는데도 그녀는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러시아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로망스의 최고 가수로 거듭난 것이

그녀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삶을 그린 전기 영화의 제목이

‘운명’(Сдьба:스지바)입니다.

 

◉ 그녀의 전기 영화 ‘운명’ 속에 등장하는

‘사랑의 메아리’(Эхо Любви:에호 류브비)를 들어봅니다.

영화 속에서 그녀의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에

그녀의 노래를 실었습니다.

사랑의 메아리로 이어지는 인연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별 먼지를 뒤집어쓰고

가지들은 휘어 구부러졌네.

나는 천만년을 넘어 너를 듣는다 우리는 메아리,

메아리 나는 네가 어디에 있든지

마음으로 너를 만나는 게 어렵지 않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헤어지지 않을 것을 안다.

우리는 서로서로 별 같은 기억!’

 

https://youtu.be/NWaKLkzRIBY

 

◉ 이 노래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1977년에 부른 노래입니다.

하지만 노래를 들어보면 사랑하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메아리를 남겨두고 먼저 떠날 것을

미리 예감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안나의 노래가 실리는 이 장면을

촬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눈물을 흘리느라 몇 차례나

연주가 중단돼 이 영화의 감독 예브게니 마베예프는

여러 차례 재촬영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안나 게르만입니다.

 

◉ 안나 게르만이 하늘의 별이 되기 한 해 전인 1981년

소련은 새로운 소혹성(小惑星)을 발견하자 거기에

‘안나 게르만’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그녀는 하늘의 별이 됐습니다.

 

◉ 그녀가 남긴 별의 노래

‘빛나라 빛나라 나의 별’

(Гори, гори моя Звезда: 가리, 가리 마야 즈베즈다)

속에서 안나는 여전히 빛나는 가을 로망스의 여인입니다.

‘빛나라 나의 별이여 너는 나만의 소중한 별

다른 어떤 것도 너를 대신할 수 없네.

별이여, 희망의 별이여

마법 같던 시절의 사랑이여

나의 죽음 나의 무덤

그 위를 영원히 바라봐 줄

너 나의 죽음을 비추어라.

빛나라 별이여! 사랑의 별!’

(배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