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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 입안의 봄
◾봄을 준비하는 ‘로제트’ 

    ◀냉이꽃 
       ◼한승기 
    ◀달맞이꽃 
       ◼장사익 
    ◀나물 캐는 처녀 
       ◼엄정행(테너)
    ◀봄 처녀
       ◼신델라(소프라노)

 

 



◉영상 10도가 넘는 
지난 주말의 낮 기온이 
주변에 쌓였던 눈을 
대부분 녹였습니다.
녹은 눈 사이사이
초록빛 봄의 색깔이 
얼굴을 내밉니다.
새로 움트는 새싹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초록빛 또는 붉은빛으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로제트 식물’입니다. 
우리말로 ‘방석 식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냉이와 민들레, 지칭개,
엉겅퀴, 꽃마리, 고들빼기,
달맞이꽃 같은 식물들입니다. 
상치와 배추 시금치 같은 
채소도 여기에 속합니다. 
녹색의 잎들을 땅바닥에 
방석처럼 넓게 펼치고 
광합성까지 하면서 
겨울을 견뎌낸 강인한 
식물들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장미꽃잎을 
펼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로제트(Rosette)식물이라 부릅니다.
해 넘어 한해살이, 
즉 두해살이식물이 대부분이지만 
여러해살이 식물도 있습니다.

◉잎을 방사선처럼 
펼친 것은 겨울에도
햇볕을 고르게 넓게 받아  
광합성을 잘하기 위한 
생존 전략입니다.
땅에 바싹 붙어 있는 것은 
지열(地熱)을 이용해 
추운 겨울을 견뎌내려는 
지혜입니다.
겨울 동안 광합성으로 만든 
영양분을 뿌리에 모읍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축적된 에너지를 줄기로 올려 
단번에 잎을 풍성하게 하고
꽃을 피웁니다.

 


◉겨울을 초록빛으로 견뎌내며 
영양분을 축적한 로제트 식물들은 
대부분 식용이 가능합니다.
그 가운데 으뜸은 
단연 냉이입니다. 
특유의 향긋한 향과 
쌉쌀한 맛은 입안에서 
봄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래서 냉이는 ‘입안의 봄’으로 
불러도 될만합니다.
냉이가 들어간 된장찌개나 
냉이로 끓인 국은 
봄철의 입맛을 살려줍니다.
겨울 동안 집 나간 입맛을 
돌아오게 만든다는 냉이입니다.

◉봄이 아니라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는 
냉이는 시장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냉이는 이른 봄 
야생으로 자라는 냉이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겨울이 추울수록 뿌리에서 나는 
냉이 향기는 더 강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면한 뿌리에서 
새잎을 펼친 냉이를 최상의 
봄나물로 치고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땅속에 몸을 숨기고 
지내는 것이 편하고 좋습니다.
하지만 봄이 온 뒤 
싹을 틔워서는 너무 늦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냉이는 잎을 
땅 위에 올려놓은 채 
겨울을 납니다. 
그렇게 되면 봄에 누구보다 먼저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라이벌이 적은 시기에 
일찍 꽃피우면 벌이나 나비, 
벌레들을 독차지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냉이가 영양분이 많고 
맛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초봄의 먹거리로 
환영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냉이의 생명력이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고 
오래전부터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냉이는 나물의 순수 우리말입니다.
추위를 견뎌낸 냉이 잎을 보면 
잎이 갈라져 있고 
구겨져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맛이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춥고 어려운 시절을 견뎌낸 
나물이 더 맛이 있다는 
역설적인 얘기와 통합니다.

◉늦은 봄이 되면 
냉이의 뿌리에서 줄기가 나와 
곧게 자랍니다. 
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냉이는 나물로서의 가치는 
거의 사라집니다. 
대신 줄기에 네 장의 꽃잎이 
십자 모양으로 달립니다.
냉이꽃이 피기 시작하면 
들판은 마치 메밀밭처럼 
냉이꽃으로 가득 찹니다.
찾아다닐 때 구분이 쉽지 않던 
냉이가 그렇게 많은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냉이와 관련된 노래는 
거의 없습니다. 
2016년 가수 한승기가 
그의 앨범 6집에 ‘냉이꽃’이란 
귀한 노래를 담았습니다.
겨울을 떨쳐내고 
봄을 불러들이는 
그리움 같은 하얀 웃음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해마다 피고 진다고 노래합니다.
https://youtu.be/tajgvpFrwhI

 

◉집 뒷동산 달맞이꽃의 
뿌리와 잎도 날씨가 추워지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더 추워지니까 색깔이 
빨갛게 변했습니다.
자외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토시아닌을 
만들어 색깔을 바꾸었습니다. 
때때로 초록 잎에
붉은 점을 찍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달맞이꽃 로제트는 사람에게 
나물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겨울을 나는 새들과 
야생동물에게는 좋은 친구가 
됩니다. 

◉달맞이꽃 로제트는 
먹거리가 귀한 겨울에 
밥상을 차려 놓고 그들이 
다녀가기를 기다립니다. 
달맞이 로제트에 잎이 나고
나중에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은 
모두 겨울에 영양분을 
모은 뿌리의 힘입니다.
가진 에너지를 주변 생명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달맞이꽃입니다.
이제 봄이 되면서 
나방과 딱정벌레를 위한 
저녁 밥상을 차릴 준비를 합니다. 
평생을 주위와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상생과 공생의 
식물입니다.
숲을 공부할 때 동기들의 
상징 식물이 바로 
이 달맞이꽃이었습니다.
덕분에 숲 해설사 자격까지  
얻었습니다.
이용복이 불렀던 ‘달맞이꽃’을
장사익의 커버로 들어봅니다. 
https://youtu.be/XY3XdK9k2MM?si=9DeYvXzJQYxvbUUp

 

◉다시 냉이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냉이는 내일 당장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논두렁, 밭두렁 같은 곳은
언제 경운기에 잘리거나 
제초제가 뿌려질지 모릅니다.
문제는 제초제입니다. 
사는 곳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고장이라고 선전하지만 
몰래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것은 냉이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먹거리에 문제가 되는
최악의 선택이라 안타깝습니다. 

 


◉경운기에 잘리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냉이는 잘려 나가도 계속 
싹을 틔우기 때문입니다.
땅속에 엄청난 양의 예비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종자은행과 같은 땅속의 
씨앗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히 등장하는 냉이입니다. 
진짜 실력을 땅속에 숨겨두고 
꾸준히 생존과 번식을 이어가는 
냉이의 강인함과 자혜를 
읽게 됩니다.

◉아낙네들이 봄의 들판에서
나물을 캐어가도 냉이는 
별로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정작 나물 캐는 처녀는 
소먹이는 목동 때문에 
나물보다는 딴 곳에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봄의 들녘에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1932년 현제명 작사 작곡의 
‘나물 캐는 처녀’입니다.
테너 엄정행입니다. 
https://youtu.be/88TBHHcSGho?si=PDw-otX7gFD6H_Gl

 

◉초봄 이야기에 상큼한 
냉이 같은 ‘봄 처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른 봄의 들판에서 
냉이를 캐는 아낙네나 처녀도 
모두 ‘봄 처녀’가 됩니다.
새 풀잎 입고 다가오는 
‘봄 처녀’는 그 자체가 
봄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봄의 향기를 캐는 
여인들도 모두 봄 처녀인 
셈입니다.
봄 처녀가 봄바람에 실어 전하는 
봄나물의 향기를 맡아봅니다.

◉1932년 이은상의 시조에 
홍난파가 곡을 붙였습니다.
새봄을 처녀같이 표현한 
시조를 가사로 사용한 
최초의 가곡입니다.
왈츠풍의 동요 같은 가곡입니다.
제때 찾아오는 봄이 
우리 곁에 다가와 
꿈과 희망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를 
들어봅니다. 
물어볼 것 없이 
저만큼 오는 봄 처녀가 
내게 올 것으로 알고
맞을 채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프라노 신델라입니다.
https://youtu.be/FL4bVTl_HAI?si=v6m6XhqekbFTEZnb

 

◉냉이와 함께 봄의 
인기 있는 나물인 달래도 
밭 한쪽 끝에서 실 날 같은
싹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만간 쑥들도 주변을 뒤덮고 
나물 캐는 아낙네들을 
부를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사람에게 좋은 
봄나물이 되기 위해 
열심히 등장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초봄에 사람에게 좋은 
먹거리가 돼줍니다. 

◉추운 겨울을 어렵게 
견뎌내며 생존해 온 
냉이의 지혜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냉이를 먹으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나의 모든 걸 바칩니다.’ 
사람이 정한 이 꽃말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속에는 냉이의  
사랑과 헌신에 대한 
고마움도 담겨 있는 듯합니다.
자연이 주는 소중한 선물에서 
사랑과 헌신을 되새기는 
좋은 봄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배석규)